초등학교 시절 경기도 김포 시골 촌놈은 제대로 된 축구를 한 적이 없다. 봄과 가을에는 농사일이 바쁘니 일 도와주어야 하고, 시간이 남는 게 겨울철이었다. 그 당시 동리 대회에 선수로 나가 잠깐 뛴 것이 전부이고, 중학교 시절에도 축구팀이 따로 없었다. 김포 지역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서울의 고등학교나 대학 축구팀 선배들이 내려와서 리프팅을 하고, 공을 갖고 노는 것을 보면 그 화려함에 깜짝 놀랐다. 공 하나로 스무명이 차던 우리는 공을 하나씩 갖고 노는 선수들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때 결심한 것이 ‘무조건 서울에 가야 한다’라는 것이었고, 결국 김포농고 1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다. 이러 저러한 학교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동북고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내가 제대로 된 축구를 배운 것은 동북고에서 고 박병석 감독을 만나면서부터다. 그때까지 공 리프팅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일찍부터 잘못된 자세나 습관에 물든 동료 선수들과 비교하면, 나는 좋은 지도자로부터 기초를 탄탄하게 다질 수 있었다. ‘공을 갖고 있지 않은 오프 더 볼’ 움직임은 최대 장점이었는데, 누구한테도 지기 싫어하는 승부욕 탓에 정말 밤낮없이 연습했다. 그 결과 동북고 2학년 때 전국대회 득점왕, 최우수선수가 됐고 대학과 실업, 국가대표팀까지 최고의 공격수로 뛸 수 있었다. 내가 공을 잘 찬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남들은 ‘아시아의 표범’이라고 추어올리곤 했다고 한다. 이후 축구협회 부회장 등 요직도 많이 맡았지만, 역시 대표팀 감독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지금 홍명보호가 2026 북중미월드컵 본선에 진출해 있는데,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좋은 성적을 내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도 1990 이탈리아월드컵에 한국 대표팀을 이끌고 나간 적이 있다. 감독은 절대적인 권한이 있지만,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부담감도 크고 고독하다. 또 감독의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경우도 생긴다. 내 경우 이탈리아월드컵 한 달 전부터 유럽에 전지훈련 캠프를 차려 시차 적응도 하고, 현지 평가전을 통해 경기 감각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려고 했다고 한다. 모든 준비도 다 마쳤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문제가 불거지면서 대회 장소인 이탈리아에는 대회 일주일 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 내막을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는데, 우리 팀이 경기를 잘했음에도 3패로 탈락한 것은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
홍명보 감독은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고지대 적응훈련 등을 순조롭게 해내고 있다. 현지에서 펼친 트리니다드토바고와 평가전에서 선수들의 컨디션은 좋아 보였다. 상대가 약팀이어서 우리 팀의 수비력을 점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잘하고 있다고 본다.
홍명보 감독은 내가 대표팀 선수로 뽑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이탈리아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 중앙 수비수 조민국이 무릎 수술로 1년을 쉬어야 했다고 한다. 당시 여러 선수를 써봤지만 만족스럽지 않았고, 고려대에 홍명보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허정무 코치와 함께 확인한 뒤 기술위원회를 설득해서 합류시킬 수 있었다. 이후 대표팀 모든 경기에서 풀타임으로 활약했는데, 그가 2002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행을 이끄는 등 정점을 찍은 뒤 대표선수 은퇴를 한 일은 많은 분이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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